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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카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2018-07-09 11: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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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카라유키 상 1.jpg (17.1KB)카라유키 상 2.jpg (15.8KB)

이 글은 박상후 전 mbc 보도 부국장 님의 글입니다.

카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 일본역사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여성사의 비극

 

“일본 남단 시마바라에서 몸파는 여성으로 보르네오 산다칸(Sandakan)까지 온 카라유키상은 동료들과 함께 힘겹게 다양한 국적, 인종의 남성을 상대하다, 일본제국 해군수병이 상륙하자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산다칸의 카라유키상은 역시 가난 때문에 보르네오 고무농장까지 온 일본인 남성과 짧은 비련의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현지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제대로 된 무덤도 없이 역사에서 외면당한 존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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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유키상의 존재를 널리 알린 일본 여성학자 야마자키 토모코 (山崎 朋子やまざき ともこ)의 저작 산다칸 하치방쇼캉(サンダカン八番娼館1972)의 스토리다. 야마자키 토모코는 근현대 일본 여성사의 비극인 카라유키상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냈고 이후 책을 읽어본 일본 상사직원이 우거진 밀림을 헤치고 버려진 카라유키상 무덤 흔적을 발견했다. 오랑우탄도 살고 있는 산다칸에 있는 카라유키상의 무덤은 현지 일본인회에 의해 정비돼 지금은 때가 되면 제사도 지낸다고 한다.

카라유키상이란 단어의 카라유키는 한자를 써서 카라유키(唐行き)라고 표기한다. 카라(唐)의 원뜻은 중국이지만 머나먼 외국이란 말로도 통용된다. 카라유키(唐行き)는 초기에 해외취업노동자를 의미했지만 어느 때부터 가난 때문에 해외로 성매매를 하러 떠나는 여성을 의미하게 됐다. 카라유키상은 바다건너 나가는 매춘부라는데 방점이 찍히면 醜業婦、賤業婦、密航婦라고도 불렀다


카라유키상의 출신지는 나가사키의 시마라(島原) 쿠마모토의 아사쿠사(天草)가 많았기 때문에 시마바라조쿠(島原族), 아사쿠사죠(天草女)라고도 했다. 특히 시마바라에는 시마바라의 자장가(島原の子守唄)라고 해서 가난 때문에 해외로 보내진 딸들을 슬퍼하며 극소수 성공해 귀향한 카라유키상을 부러워하는 가난한 농가의 딸의 마음을 묘사한 곡도 있다.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리던 석탄이 선적되던 시마바라 남단 쿠치노즈(口之津)항에서는 카라유키상도 말레이시아로 가는 밀항선에 몸을 맡겼다. 현재 쿠치노즈 역사박물관에는 당시 카라유상의 양도증서와 가방같은 물건들도 전시돼 있다.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시대부터 지속된 공창제가 있어 지독한 가난에 시달린 가정에서는 부모가 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모에게는 딸을 팔 권리가 있었고 가난한 집을 먹여 살리기 위해 팔려가는 딸들은 그것을 효도로 생각했다. 다만 카라유키는 팔려가는 곳이 외국이라는 점에서 구분될 뿐이었다. 메이지와 다이쇼시대 외국으로 건너건 카라유키상은 3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그 이전시기까지 합치면 50만 명 정도라고 한다.


카라유키가 되는 과정은 다양하다. 가장 많은 경우는 속아서 팔려가는 것이다. 에도시대부터 인신매매에 뛰어든 여성 뚜쟁이를 제겐(女衒ぜげん)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들이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로 가서 서비스업을 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는 식으로 농촌의 어린 여성을 꼬드낀 뒤 화물선 선원과 한통속이 돼 시모노세키나 모지 나가사키나 구찌노즈, 고베등에서 밀항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밀항 비용을 구실로 500엔 정도의 빚을 지운 뒤 현지에서 돈을 갚으라면서 매춘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해외로 건너가 많은 돈을 벌고 귀국해 가족들을 부양하겠다면서 자발적으로 카라유키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고, 부모가 제겐(女衒ぜげん)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화교들의 해외진출처럼 카라유키상들이 해외 구석구석 안간 곳이 없는 곳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중국 만주, 러시아의 시베리아, 멀리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와 탄자니아에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카라유키상들의 개인사는 비극적이었지만 일본인 특유의 혼네와 타테마에 때문인지 겉으로 드러난 카라유키상들은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로전쟁(日露戰爭)당시 육군의 밀정이었던 마키요(真清まきよ)라는 이는 ‘曠野(こうや)の花‘라는 저서에서 “일본여성은 순종적이고, 정직하며 친절하다. 외국인 여성처럼 지독한 면이 없으며, 돈을 탐하거나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외국인들의 평판을 기록했다. 이 책은 나중에 NHK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유럽에 유학했던 나쯔메소세키(夏目漱石), 모리오가이(森鴎外)같은 지식인들도 싱가포르에 들렀을 때 카라유키상에 대한 소감을 남겼는데 대체로 “그녀들에게는 추호의 어두움이 없었며 넋두리도 하지 않고 명랑함도 잃지 않아 놀라웠다”는 것이었다.

 

카라유키상들의 생활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모두 철저하게 일본식이었다. 또 국가에도 맹목적으로 충성했다. 천황의 사진을 방에 걸고 현관에는 일장기를 게양했으며 조석으로 궁성요배까지 했다. 카라유키상들은 마다가스카르에서 일로전쟁(日露戰爭)때 발틱함대의 동향을 보고 일본을 걱정했고 싱가포르에서는 저금했던 돈과 비녀까지 뽑아 주면서 나라를 위해 썼으면 한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들이 본국에 송금한 돈이 일청(日淸), 일로(日露)전쟁에 쓰인 군비에도 충당됐다는 얘기도 있다.

이들은 그러나 해외에서 성병, 말라리아, 폐병 등으로 대부분 21세 정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배운 것 없는 빈농의 딸들로 비극적인 운명에 순응해 죽어갔지만 일본에서는 매춘부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일본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이다. 때문에 교과서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지만 여성학자들의 꾸준한 연구소재가 되고 있고 이들을 재조명하는 영화나 다큐는 종종 만들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