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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첩보의 신 아키쿠사 슌(秋草俊)2018-07-02 10: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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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BC 보도 부국장 님의 글입니다.

첩보의 신 아키쿠사 슌(秋草俊)과 나가노학교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정보기관은 내각조사실로 이것의 모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설립된 육군나가노학교(원래는 후방근무요원양성소)다. 이 기관의 제1기생이 모인 것은 1938년 봄이었다. 각 부대에서 몇 명씩 최우수 병력을 추천하라는 육군대신의 명령에 따라 가족관계, 사상검증, 면접을 거쳐 20명이 선발됐다.

이들은 토쿄에 오면 사복차림으로 야스쿠니 신사의 두 번째 도리이아래로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들이 집결하자 양복을 차려입은 한 신사가 맞았다. 나가노학교의 창설자인 아키쿠사 슌(秋草俊)이었다. 사복차림이니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했다가는 가벼운 질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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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쿠사의 안내로 들어간 학교는 낡은 2층집이었고 6개의 방, 경비실, 교실이 하나씩 있었고 사무실과 침실이 있을 뿐이었다.

대사관이나 공사관의 무관은 2년 내지 5년 근무하고 이동을 하기 때문에 외국현지의 정치, 경제, 사상, 언어, 풍습 등에 익숙해진 상태로 뼈를 묻을 각오로 눌러 살아야 할 각오로 무관이 파악할 수 없는 정보를 수집하는 요원을 양성하는 것이 나가노 학교의 설립취지였다.

첩보원은 기본적으로 민간인처럼 보여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복을 입지 않았고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학과교육을 받고 나머지는 자유시간이었다. 통금시간도 없어 아침 10시까지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외박도 허용됐다.

나가노학교는 요원들이 외국에서 몇십년 혹은 평생 동안 상인이나 회사원으로 위장해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경직된 군인 특유의 버릇을 없애는데도 주력했다. 당시 군인이 신격화된 천황의 이름을 듣는 순간 긴장해 부동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가노 학교에서는 “그런 자세는 군인이나 하는 것이다, 철저히 민간인이 돼야 한다”고 질책했다고 한다.

아키쿠사와 같은 시기에 나가노학교 운영을 맡았던 후쿠모토 카메지(福本亀治)는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기합이나 맹훈련만으로는 외국에서의 기나긴 고독과 고생을 감당할 수 없다. 지위도 명예도 금전도 필요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버려지는 돌이 될 각오만 있으면 된다(地位も名誉も金もいらない。国と国民のために、捨て石となる覚悟)면서 임무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부담 없이 떠나라(もし、いやだったら遠慮なく申し出ろ)고 훈시했다.

아키쿠사는 나가노학교의 초석을 놓은 뒤 호시노이찌(星野一郎)라는 가명으로 베를린으로 가서 스파이망을 조직하고 망명폴란드정부의 정보기관인 G와 접촉해 도청 암호해독 도촬 등의 기술로 대소정보를 수집한다. 이때 스탈린 암살계획을 입안했다는 확인 안된 이야기도 있다.

아키쿠사는 1930년대부터 첩보활동을 한 인물로 육군위탁생으로 동경외국어대를 거쳐 하얼빈에서 유학한 뒤 관동특무기관에 근무한다. 러시아어에 능통하면서 유럽문화에 정통했던 아키쿠사는 러시아와의 정보전쟁 최전선인 하얼빈에서 백계러시아인 사무국 설립에 관여했고 반소단체인 러시아파시스트당과도 비밀리에 제휴하면서 소련에 대한 정보를 활발하게 수집했다.
물론 소련도 아키쿠사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결국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고 120명의 소련군 공정부대가 투입돼 철도, 교량, 통신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다. 이들은 마루타로 악명이 높은 731세균 부대도 수색한다.

사료에는 없지만 아키쿠사 슌의 아들 야스시의 증언에 따르면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이 아키쿠사 슌을 찾아가 하얼빈 교외 샹팡(香坊)에 전용기가 대기하고 있으니 함께 피신하자고 권유했지만 아키쿠사는 책임자로서 하얼빈을 떠날 수 없다. 소련군에 체포될 각오가 돼 있으니 가려면 혼자 가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얼빈에서 소련군에 체포된 아키쿠사는 모스크바로 압송돼 국가보안국(MGB)이 관리하는 루비안카감옥에 투옥됐다. 그는 새벽에 불려나가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낮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혹독한 고문을 반년가량 견디다 폐결핵에 걸려 1949년 55세에 타계했다.

아키쿠사는 모스크바 교외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현지에 뼈를 묻을 각오로 머무른다(その地に骨を埋める覚悟で定住し)고 나가노학교 요원들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대러시아 첩보의 일인자였던 그는 러시아에 뼈를 묻은 것이다.